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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 사랑하는 사람이 패자라고 하는 사람이 언제나 패자인 이유

401호 2013. 10. 29. 12:58

 서운함이란 감정은 아마 상대에게 조건없이 제공했다고 생각되는 어떤 호의를 다시 되돌려 받지 못함에서 오는 것이 아닐까? 

 

 어떤 호의에 대한 주는 쪽과 받는 쪽, 혹은 줬다고 생각하거나 받았다고 생각하는 쪽의 감정의 크기는 지극히 상호 배타적이다. 내가 누군가에게 보여주었던 호의는 적어놓지 않았다면 -이것도 나름의 문제가 있겠지만- 기억에 의존 할 수 밖에 없는데 우리는 벌어진 사건의 온전한 진실을 기억할 만한 능력이 거의 없다. 기억은 언제나 감정의 하수인 노릇을 해왔을 뿐 우리는 객관적인 기억을 유지 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진 적이 한번도 없었다. 거기다가 삶속에서 어떤 오류에 대해 사사건건 의심하고 고민하는게 피곤한일이라 그런지 우리들의 마음은 항상 나에게 유리한 쪽으로 기억을 해석함으로써 본인에게 어떤 확신을 주는 멋진 회로를 내장하고 있다. 여기서 발생되는 사실과 기억의 간격에서 우리는 서로에게 필요 이상으로 서운해 한다.

 

 또 조건없이 남들을 사랑하고 상대에게 마냥 잘해주고만 싶은 마음은 대부분 위선이 된다. 말하자면 더 사랑하는 쪽이 언제나 패자가 되는 현실, 우리는 혼자가 되는걸 너무나도 무서워 하므로 서로에게 최대한 호의를 베풀고자 함을 어떤식으로든 상호합의한 관계를 사랑과 우정이라고 부르곤 하는것 같다. 그리고 이러한 관계는 사실 우리삶의 기반이 된다. 하지만 그것의 실상은 점점 어두워만 가는 것 같다. 이것이 점점 거래의 형태를 띠어 가기 때문이다. 거래의 기본은 가치를 매기는 작업이다. 모든 감정은 가격표가 붙음으로써 특유의 가치를 모두 상실해 버린다. 가격이 있다는건 어디엔가는 대체품이 있다는 것이므로 감정은 거래에 소요되는 에너지로 인해 결국 아무것도 아닌게 되어 버린다. 우리는 말과 더불어 거래하는 법을 가장 먼저 배운다. 거래하는 개인은 상대와 주고 받은 감정과 편의의 손익분기점을 기준으로 고마움과 서운함 사이를 왕복한다. 이런 관점이라면 언제나 많이 주는 사람,  혹은 많이 주었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항상 패자가 된다.

 

 사건을 기억할 만한 능력이 별로 없음에도 나는 언제나 어떤 사건들에 대해 생각하며 그 과정에서 오해를 심화하고 그릇된 결론을 내리는데 안간힘을 쓴다. 또 시간을 같이 보내는것, 이야기를 들어주는 것, 혹은 이야기에 맞장구를 쳐주는것 아니면 친절한 태도를 유지하는 것 조차도 일종의 거래로 여기며 참으로 빈곤하게도 살아가고 있다. 그러고 보면 괜시리 혼자 서운해 하면서 나의 세계를 자꾸만 축소시켜가는, 자유에 대해 그렇게 떠들어 대면서도 정작 나의 가장 많은 자유를 제한하는 건 딱하게도 나의 편협함과 성급함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