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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식과 봄

 화요일과 금요일 저녁에 한시간씩 학원에 가서 피아노를 배운지 한달이 조금 넘었다. 집에서 길게 잡아도 5분만 걸어가면 피아노 학원이 있는데 학원에 등록하기 위해서 나는 학원 창문을 한 3년은 쳐다봐야 했다. 또 '배워야 겠다!' 고 결심하곤 학원 창문에 쓰여진 전화번호를 핸드폰에 입력하고 다시 또 두어달이 넘어서야 진짜로 학원에 다닐 수 있었다. '나는 피아노를 배우고 싶은 사람이지만, 혹은 배워야 하는 사람이지만 내가 피아노를 배워도 되는 사람인가?' 에 대한 나름의 답변을 준비하는데 한 3년하고도 몇개월이 걸린 셈이다. 지난 3년간 나는 변함없이 직업이 있었고 대부분 시간에 맞춰 출퇴근 했으며 일주일에 두시간도 못낼만큼 바빠본 적이 한번도 없으므로 이런 결론을 내리는데 3년씩이나 걸렸다는건 참 황당한일이다. 그래서 이제서야 피아노를 배우게 된 걸 불행으로 여겨야 하는지 다행으로 여겨야 하는지 모르겠지만 이것이 아주 무식한 일이었음은 틀림없다. 옆방에 초등학생이 있는데 피아노를 너무 잘쳐서 선생님한테 얼마나 치면 저렇게 칠 수 있냐고 하니 한 3년이면 저렇게 될 수 있다고 한다.

 

 나는 3년동안 같은 시험에서 총 여섯번 떨어졌다. '붙으면 사진이라도 찍어놓아야지!' 하고 다 쓴 볼펜을 안버리고 하나씩 모았는데 그게 이제 30자루가 넘고 비슷한 심정으로 모아둔 공책은 이미 내 키를 훌쩍 넘겼다. 최연소라는 타이틀은 아무리 우겨봐도 올해를 기점으로 아예 물건너 갔으며 사실 그런 타이틀에 의미를 두던 내가 너무 낯설어 그만 나를 비웃어 버리고 싶어진 지도 꽤 오래됐다. 그리고 요새는 이상하게도 합격을 하더라도 크게 달리질 것도 없다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아마 내일 붙는다면 당장은 월급이 조금 오를거고 어쩌면 시간이 조금 더 없어질 수 있다. 당장 회사를 그만두더라도 금방 비슷한 벌이를 할 수 있는지 없는지는 모르겠지만, 스스로 있다고 여기며 남들에게 허세를 떨 때 남들이 아예 그것이 불가능일이 아닐지는 모르겠다고 여겨주는 호사를 누릴 수도 있다. 또 거동이 가능할때까지 일 할 수 있다고 떠들 수도 있으나 그건 20~30년뒤의 사회가 지금과 같을 거라는 순진한 생각에 기초한 것이다. 무엇보다 결국 모든건 그저 남의 일을 할 수 있는 가치가 조금 더 올라가거나, 올라간것 처럼 보일 수 있는 기회를 얻는 것일 뿐이다. 조금 더 매력적인 상품으로 소비되기 위해 삶을 그렇게나 써버린다는건 조금은 슬픈일이라는 생각이 든다. 정말이지 큰일이다.

 

 1년차 때쯤 시험에 붙으면 다 그만두고 보증금 빼서 아무데나 비행기 타고 나가 한 1년쯤 기타들고 돌아다니고 싶다고 해서 같이 공부하던 사람들을 황당하게 한적이 있었다. 그로부터 3년이 지난 지금 시험은, 혹은 불합격은 여러모로 조금은 도움이 되어 준 것도 같으나 인생이 아직도 미완성이라고 스스로 여기며 보증금을 유지하게 해주는 가장 절절하지만 황당한 이유가 되어 주기도 했다. 저 멀리 평행우주에 존재하는 나보다 운이 조금 더 좋은 1년차 합격생인 나는 과감히 그 시점에 보증금을 빼서 맘대로 놀다 올 수 있었을까? 만나본적이 없어서 잘은 모르겠지만 아마 그도 합격을 삶의 조건으로 보았으므로 그냥 비슷하게 회사 다니며 비슷하게 살고 있을거 같다는 생각이 든다. 만약 스스로 선택했다기 보다는 어떤 모종의 이유로 인해 그냥 안붙고 보증금 빼서 맘대로 놀다온, 혹은 살다온 또 다른 평행우주의 내가 아마 지금의 내 모습을 본다면 그 때 그러길 참 잘했다고, 저것 보라고 하며 안도의 한숨을 내쉬고 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하다하다 못해 평행우주에 사는 나까지 상상을 해가며 본인의 불행을 언제든 증명해 낼 수 있는 사람은 어떤 성취, 혹은 모든 성취에 의해 인생이 극적으로 달라지지 않는다는 걸 알거나 그냥 혼자서만 그래왔던 사람일 것이다. 혹시 조금 더 생각할 여유가 있다면 아마도 요새같은 세상에선 자신이 생각할 수 있는 성취라는게 결국 고작 자신의 상품성을 높이려는 가련한 노력이었다는걸 아는 사람일 수도 있다. 이러한 생각들을 제정신을 가지고 하는게 조금 벅찬일인건지 생각은 점점 감정과 동기화 되어 관점은 언제나 상대적이라는 뻔한 상식을 당사자는 결국 거부하게 된다. 그래서 지친 나는 단순히 '그저 헛수고를 했을 뿐이다!' 라고 한참을 떠들고 다니고 싶어진다.

 

 다 망해버렸다고 이야기 하는건 확실히 우울하지만 또 생각해 보면 다소 유쾌한 면이 있어 묘한 방식으로 당사자에게 위안이 되는 것도 같다. 하지만 나는 나도 자존심이 있는 사람이라, 사실은 겁이 많은 사람이라 이것이 실패를 스스로 정당화하기 위한 필사적인 몸부림인지, 그러니까 고작 절망의 다른 모습인건지 사사건건 의심해볼 필요성을 느낀다. 반면 드물게 기분이 참 좋은 날이라면 이건 스스로를 덜 괴롭히기로 결심한 나의 어떤 부분이 청하는 작은 악수일지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 수도 있다. 하지만 이런 생각들은 서로 꼬리를 물어 삶은 그저 절망이고 성장이든 행복이든 그런건 그저 잠깐의 고취상태가 아닌가 하는 생각으로 까지 이어져 결국 모든게 무서워진 나는 '아직 아무것도 모르겠습니다.' 라고 말 할 수 밖에 없어진다. 그리고 이쯤되면 생각은 더 이상 생각이 아닌게 된다.


 지난 토요일에는 아침 일찍 유난스레 책읽으러 나가는 길에 날씨도 너무 좋고 꽃도 예뻐서 다시 집에 들러 책은 놓고 기타를 가지고 공원에서 혼자 놀았다. 지나가는 사람들에게 신경을 쓰는듯 안쓰는듯 약간은 묘한 분위가가 참 좋았고 어떤 등산객 아저씨는 무심하게 지나가며 노래가 참 좋다고까지 이야기 해줘서 놀랐다. 아무튼 그러고 놀다 보니 근 3년간 그렇게도 떠들고 다녔던 음악생활의 지속과 발전을 가능하게 해준 가장 큰 변수는 합격도 아니고 동료도 아니고 시간도 아니고 장소도 뭣도 아니고 꽃과 날씨였다. 며칠 좀 춥긴 했지만 동네에는 꽃이 한참 멋지게 피었고, 얼마간은 꽃이 피어있을거고, 날씨는 더워지기 전까지는 아마도 따뜻해질거다. 그리고 나는 몇년째 꽤 좋은 기타를 안팔고 있다. 또 재치있게 찾아보면 쓸만한 시간과 공간도 충분히 있다. 그러므로 아직 갖춰지지 않은 어떤 조건들 -이런 조건들은 아직 경험해보지 않고 말하는 것이므로 사실 존재하지 않는 것일 가능성이 높다.-, 그리고 이미 내안에 있는 소소한 성취들을 애써 모른척 하며 불만스레 떠들어 대는 것도 역시나 무식한 일이었다.

 

 나는 여전히 많은 시간을 들여 하기 싫은 공부를 해야만 하는, 이제는 이게 공부인지 아닌지도 조금 헷갈려서 종종 혼란스러운 사람이다. 하물며 공부보다 28.3배는 하기 싫은 근무를 그만두지도 못하는 몇년째 아무것도 나아지지 않은 사람이지만 이상하게도 삶은 별탈없이 계속되고 더 이상하게도 나는 가끔씩 행복을 느낀다. 그리고 그럴때면 종종 모든 평행 우주에 있는 모든 나들중에 가장 괜찮은 내가 느낄 법한 행복도 결국은 비슷한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하지만 앞서 말한바, 나도 자존심이 있는 사람이라 합격은 어느 때 보다도 가까이 와있으므로 나는 올해 꼭 합격해서 더 시간 많은 사람이 될거라고, 모든 부분이 완성된 곡이 다섯개가 넘으면 꼭 공연자리를 찾아보겠다고 다짐해본다. 이것이 나를 조금 덜 팔기위한 몸무림인지, 아니면 그런건 애초에 불가능한건지, 따라서 그저 헛수고를 계속하거나 말거나 해야하는건지 도저히 모르겠는 나의 무식은 봄을 넘어 당분간 계속될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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