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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의 위안_정신승리 메뉴얼

 시험끝나고 수고했다고 술을 마셨다. 많이 마셨다. 버스카드를 항상 외투주머니에만 넣고 다녀서 그런지 이틀이 지나고 나서야 지갑을 잃어 버렸다는걸 알았다. 지갑은 한달전에 생일선물로 받은 것이었다. 그안에는 폴라로이드 사진과 발급된지 두어달된 주민등록증이 들어있다. 주민등록증을 새로 발급받은 이유는 지갑을 잃어버려서 였다. 지갑이라던가 가방이라던가 걸치고 다니던 옷이라던가 하는걸 잃어버리는 일을 남들은 평생에 한두번 겪을것 같은데 나는 열개가 조금 안되는거 같다.

 

 보통 이런일이 생기면 적어도 3일간은 괴로워한다. 누구나 그렇겠지만 자신을 괴롭히는 방법을 누구보다도 잘알고 있는 나는 여러가지 방법으로 나를 괴롭힐 수 있다. 그런식으로 충분한 고통을 겪는다고 해서 벌어진일이 다시 벌어지지 않게 되거나 어느정도 정당해져서 이젠 맘놓고 받아들여질 수 있는 수준이 되는게 절대 아니기 때문에 이건 참 뻘짓이다. 지갑은 선물받았지만 내꺼였고 주민등록증은 5,000원이면 다시 발급받을 수 있고 따지고 들면 복구하지 못하는건 폴라로이드사진을 빼면 없다.

 

 알랭 드 보통의 철학의 위안을 초반쯤 읽고 이건 정신승리 메뉴얼이야!! 라고 누군가에게 이야기 한 기억이 난다. '가난한 존재들을 위하여' 부분을 읽고 있던 차였는데 궁팝함이 우리를 불행하게 할 수 있지만 많은 돈이 선형적으로 우리를 행복하게 해줄 수 없다는, 다들 알고 있을 법한 내용을 아주 멋지게 써놨다. 

 

 인기없는 사람들을 위해 소크라테스는 어떠한 관습도 무조건 옳은 것은 아니라며 마이너라고 해서 절대 주눅들지 말라 했다. 가난한 사람들을 위해 에피쿠로스는 행복의 필요조건은 사실 사색과 우정과 자유라 여기는 생각보다 돈이 들지 않는다고 했다. 좌절한 사람들을 위해 세네카는 티비 리모콘이 항상 니가 원하는 자리에 있는 세상이 어디 존재하기나 하더냐고 했다. 자신이 멍청하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을 위해 몽테뉴는 평범하고 도덕적인 삶도 충분한 성취므로 똑똑하다느니 멍청하다느니 허세떨지 말고 여유되면 책을 좀 읽어보라 했다. 사랑에 상심한 사람들을 위해 쇼펜하우어는 사랑의 끌림은 사실 본인이 아닌 건강한 후세를 위한 의지므로 거절의 아픔은 딱 배고픔 정도가 적당하다 했다. 어려움에 처한 사람들을 위해 니체는 모든 어려움을 즉시 마비시키려 하는것이야 말로 멍청한 짓이므로 술 좀 그만 마시라고, 어려움이 우리 삶에 드리우는 그림자에 당혹할 것이 아니라 거기서 아름다운 무언가를 일구지 못하는 사실에 당혹해야 한다고 했다. 

 

 독서는 멋진일이지만 감상은 오래가지 않고 기억력은 터무니 없이 부정확하다. 너무나 일찍 암에 걸려 버리긴 싫기 때문에 삶이 자꾸만 미워질때 찾아 읽어보면 좋겠다는 생각으로 몇몇 티나게 멋진 부분들에 태그를 붙여 회사 책상에 꽂아 놓았다. 손만 뻗으면 닿을 수 있는 거리에 위치한 색색의 태그들을 바라보며 통조림과 과자가 잔뜩 쌓여있는 찬장을 가진것 마냥 든든한 느낌이 든다. 다음에 잃어버릴 지갑을 위해, 그리고 잊어버릴때 쯤이면 항상 찾아와 삶을 온통 흔들어 놓는 모르는 무언가들을 위해 꼼꼼히 태그를 붙이며 정신승리를 도모하는 일은 어쩌면 꽤 중요한일 일지도 모른다.

 

 

 

 

 

 


철학의 위안

저자
알랭 드 보통 지음
출판사
청미래 | 2012-04-05 출간
카테고리
시/에세이
책소개
철학의 위안 불안한 존재들을 위하여국제적인 베스트셀러 저자인 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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