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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의 향기_1점이 아닌 1.84점

 시험에 떨어졌다. 합격점은 60점이고 내 점수는 1.84점 모자란 58.16점이다. 저번 시험 점수는 53.8점 이었는데 그때 나는 54점 맞았다고 생각했다. 비슷한 기준을 적용하면 약 2점이 모자란건데 이상하게 1점 모자라서 합격 못했다고 말하고 싶은 기분이 강하게 든다. 이런 영악한 산수는 초라하기 그지 없는데 거기다 쓸데없기 까지 해서 참 난감하다. 마지막 교시에 그림 하나 혹은 표하나만 기억해 냈으면 붙었을 점수라고 생각도 해봤는데... 그냥 말을 말자.

 

 시간의 향기는 철학책이다. 독일책을 번역해서 그런지 아님 원래 철학책이 어려운건지 참 안읽힌다. 처음보는 우리말도 많다. 뭔소리인지 모르고 한참 읽다보면 가끔 그런가 보다 하는 구절이 나오기도 하는데 이것도 몇줄 더 가면 또 모르겠다. 어느새 책을 읽으며 나쁜것과 안나쁜것을 구별하고 거기에 추측해가며 읽는 식이 익숙해져서인지 줄이 바뀔때마다 단어의 색깔이 확확 바뀌는 배신의 경험은 참 낯설다. 아무튼 왕창 태그를 붙여가며 다 읽긴 읽었다. 언젠가 아침에 버스정류장에서 태그 붙인곳만 한번 다시 보니 어느정도 좀 더 와닿았던 것도 같다.

 

 책은 시작과 완료만이 중요하여 중간과정은 최대한 줄이고자 하는 욕망이 삶의 전반적인 가속화를 부르고 이로 인해 시간은 점점 향기를 잃어간다고 했다. 향기나는 시간이란 처음과 중간 과정과 끝으로 이루어 지는 어떤 완결된 형식을 가진 혹은 다시 시작으로 순환하기도 하는 시간을 말한다. 이런것들은 삶에서 어떤 지속성을 맛보게 해주는데 이런 느낌은 죽음이 필연인 우리들에게 참 중요하다고 한다. 이러한 시간은 활동적인 삶으로 얻어질 순 없고 오히려 머뭇거림, 잠시멈춤과 같은 부정적인 계기를 통해서 얻어질 수 있다고 하는데 이건 다니엘 카너먼의 생각에 관한 생각이란 책과도 묘하게 맞는 부분이 있다. 머뭇거림이야 말로 시스템 1을 효과적으로 제어하는 방법이기 때문이다. 또 죽음에 대한 공포로써 우리를 지배하고자 하는 노예주인의 이야기도 나오는데 요새같은때 이런 이야기는 참 절절히 와닿는다.

 

 밤늦게까지 게임하고 늦잠자고 일어나 회사가기 싫어 휴가를 쓸까 말까 고민했다는 J는 마침 그날 아침 프로에서 어떤 공기업다니는 여자를 본다. 아이도 키우고 점심시간에 요가하고 아이 발표회 보러 가고 야간대학원서 박사 두개나 따고 밤에는 주부모델까지 하면서 자기는 아무것도 안하는 시간이 너무 아깝다 했다고, 그때 J는 게임하고 늦잠자서 휴가쓸까 하는 자신이 좀 딱해보였다고 했다. 책을 인용해 이래저래 뭐라뭐라 해서 그여자 인생 망했다고 이야기 하고 싶었던 나는 당췌 정리가 되지 않아 말을 할 수 없었다. 어려운건 살짝살짝 넘어가며 독서를 그저 책 다 읽었다는 개념으로만 받아 들이던, 그리고 그걸로 고작 남의 인생을 판단하려 드는 내 삶에도 이미 완결된 형태를 이룬 시간의 부재는 충분히 와있다.

 

 2년정도 시험을 준비하며 꽤 많은 것들이 변했다. 나는 이제 게임을 하지 않는다. 회사에서는 꼭 해야 할일만 최대한 천천히 한다. 혼자서도 오래 가만히 앉아있을 수 있고 책을 읽기 시작했다. 가끔은 돈에 대한 해방을 생각하고, 소소한 느낌들에 대해 주위사람들 한테 더듬 말해보기도 한다. 그리고 공부를 하는 이유는 오래전부터 그랬듯이 무리없이 시간이 많은 사람이 되기 위해서다. 생각해 보면 별로 길지도 않은 수험의 시간은 사실 별로 괴롭지도 않다. 조금 더 많은 삶의 자유를 위한 완결된 형식의 하나로써 천천히 공부한다고 생각해보면 어렴풋한 미래의 기한들과 그에 걸맞는 상상들은 참 부질없다는 생각이 들기까지 하다. 그러므로 언젠가 합격증을 보며 허세진 눈빛으로 첫시험에 붙지 않을걸 참 감사한다고 생각해 버릴 수 있을까? 됐고 그냥 오늘은 봄볕이 참 좋고 나는 아직 살아가고 있다.

 

 

 


시간의 향기

저자
한병철 지음
출판사
문학과지성사 | 2013-03-15 출간
카테고리
인문
책소개
“오늘날 필요한 것은 다른 시간, 즉 일의 시간이 아닌 새로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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