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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도 여행

 혼자 2박 3일로 제주도에 다녀왔다. 공항에 저녁쯤 도착해 애월의 유명하다는 게스트 하우스를 찾아가 짐을 풀고 항구로 구경을 갔다. 운이 좋아서 가는 길에 우연히 만난 동네 할아버지랑 이런저런 이야기를 할 수 있었다. 할아버지의 처가는 용산에 있다고 한다. 항구는 밤이라 그런지 아니면 원래 그런 것인지 사람이 하나도 없었다. 천천히 이곳저곳 돌아다니다가 그냥 눈앞에 보이는 식당에 들어가 갈칫국을 먹었다. 맛있게 밥을 먹고 나오니 별이 생각보다 너무너무 많아서 놀랐다. 다음 날 아침에는 현무암투성이의 해변 길을 한참 걸으며 마일즈 데이비스를 들었다. 한 곡이 20분쯤 되는 이 앨범을 들고 다닌 게 못돼도 1년은 된 거 같은데 한 곡을 처음부터 끝까지 다 듣기는 또 처음이다.


 둘째 날은 우도에서 묵었는데 관광지 보다는 바닷가의 시골 마을이 보고 싶어서 인적이 드문 길을 골라 걸었다. 낮은 담벼락의 골목길과 비슷비슷한 집들, 노인들, 땅콩밭과 학교와 마을회관, 우체국, 운영하지 않는 박물관 같은 걸 볼 수 있었다. 멀리 바다가 보이는 마을회관 정자에서 별 생각 없이 한 참을 앉아 있었는데 대낮에 바깥에서 아무런 소리가 들리지 않는 곳에 이렇게 혼자 있어 본 게 얼마 만인가, 혹은 이게 처음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했다. 아무 생각이 없이 가만히 앉아 있는 게 너무 괜찮아서 당황스러웠다. 하루종일 그러고 있으라고 해도 그럴 수 있을 것 같았다. 어쩌면 나는 일상에서 항상 반응을 강요당하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하얀 모래를 가진 해수욕장과 검은 모래를 가진 해수욕장에 모두 발을 담가보며 아무도 수영하지 않아서 가방 속의 수영복을 부끄러워했다. 소랑 말이 방목되어 있는 언덕을 오르내리며 평화롭게 풀만 뜯고 있는 소 옆에 앉아 진심으로 소를 부러워하기도 하며 천천히 섬을 반 바퀴 걸어서 도는 데는 네 시간이 조금 넘어 걸렸다. 대부분의 사람은 오토바이나 차를 빌려서 돌아다닌다. 이곳에는 분명히 걷지 않고서는 느끼지 못하는 어떤 게 있다고 생각한다. 땅콩 아이스크림이나 전복 짜장면 먹으러 여기까지 온 건 아닐 텐데... 해 질 녘이 되어 마지막 배가 떠날 시간이 되니 사람들은 대부분 빠져나가고 섬은 더 조용해졌다.


 기타는 아무래도 악기보다는 장식품으로써의 가치가 더 큰 물건이라 그런지 이틀 모두 숙소와 숙소 주변의 카페에서 빌릴 수 있었다. 밤에 파도를 보며 한참 기타를 치면서 되지도 않는 노래를 부르고 그랬다. 첫날에는 그냥 생각나는 대로 아무거나 하다 보니 왠지 리스트의 필요성이 느껴져서 둘째 날에는 셋리스트까지 잔뜩 적어서 그거 보며 놀았다. 셋리스트는 대강 스무 곡이 남짓이었는데 어이없게도 내가 만든 노래가 반쯤은 된다. 음악을 그래도 좋아하긴 하는구나... 하고 생각했고 별 생각 없이 맘대로 이렇게 놀아본 건 또 언젠가... 하는 생각을 또 했다. 그러고 보면 아무래도 나는 뭔가 잘못 살고 있는지도,


 사실 제주도까지 올 생각은 없었다. 좀 많이 걷고 싶었고 별생각 안 하고 경치 좋은 데서 가만히 앉아 있고 싶었다. 그리고 중간중간 비는 시간에는 오래전에 충동구매한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를 읽고 싶었다.(1권만 ㅎㅎ) 만원 버스에서 혹은 만원 버스를 기다리며 짬짬이 읽던 책은 참 어려웠다. 읽는 내내 나의 문장 이해 능력을 탓했는데 사실 천천히 읽거나 한 문장을 두세 번씩 읽거나 아니면 대충 보면서 중간에 끌리는 문장만 골라 보든가 했으면 또 될 일이다. 그러고 보면 책의 모든 부분을 빠짐없이 짚어가며 읽어내야 한다는 것, 과정은 어떤 명확한 목적을 향해 낭비 없이 진행되어야 한다는 것, 혹은 저자는 독자에게 친절한 설명을 최대한도로 제공해야 한다는 것도 꼭 맞는 말은 아니다. 그러고 보면 여행도 마찬가지가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든다. 어쩌면, 삶도


 여행의 마지막 아침, 우도에서 나오는 첫배에는 일하러 가는 할아버지, 할머니의 무리와 등교하는 고등학생이 한 명 있었다. 지인이 추천해준 거문오름에 늦지 않고 가야 했기 때문에 조금 서둘렀는데 항구에서 거문오름 근처로 가는 버스는 시간이 맞지 않아 최대한 근방으로 가는 이른 버스를 타고 또 한 10km 정도를 걸었다. 가는 길에 혼자 노래도 부르고 그랬다. 우리는 느리게 걷자 걷자 걷자~. 도착한 거문오름은 그냥 어디에서나 볼 수 있는 뒷산 같았다. 원시림이 있다고 해서 기대했는데 오랫동안 살아남은 나무들치고 너무 어려 보였다.


 공항에 다시 도착해서 내가 제주도 다녀온 걸 아는 사람들을 위한 선물을 조금 샀다. 굳이 제주도에서만 살 수 있는 건 아닌 것들로 보인다. 돌아오는 비행기는 들어오는 비행기보다는 조금 덜 무서웠다. 두어 번 정도는 더 타봐야 아예 안 무서울 것 같다. 전철을 타고 집에 오는 길은 피곤했고 덤덤했다. 그리고 나는 이제 마을회관의 정자와 현무암투성이의 바닷길과 밤바다에 놓인 별들을 이따금 그리워하는 사람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