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들은 흔히 사랑을 시작할때 자신의 결점에 대한 완벽한 대안을 섣불리 상대에게 찾아낸다. 이른바 이러한 이상화 작업은 본질적으로 오해이며 사실 오해의 대상이 되는 상대방은 상당한 원인 제공을 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자주 원망의 대상이 된다. 니가 이런 사람인줄 몰랐다며... 최선을 다해 아닌척 하지만 대부분의 우리는 사실 약하고 상처받기 쉽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나와는 본질적으로 다른 이상적인 사람이 존재한다고 멋대로 생각해 버리는것, 또 그 사람과의 만남으로 인해 나의 결점이 보완될 수 있다는 생각을 해버리는건 순진하다. 그리고 이러한 순진함은 대부분 대가가 크다.
누군가는 사랑이란 건강한 퇴행으로 유년기에 받아 내면화된 상처와 아픔을 치료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라고도 한다. 나는 이런 생각을 꽤 오랫동안 끌고 다녔다. 하지만 자신에게 치료해야할 아픔이 있다는 가정은 참 위험하다. 기억하지 못하는 아픔과 상처가 있고 그것이 현재의 나에게 영향을 미친다는 생각은 우리의 삶속에서 때때로 나타나는 난감하고 지속되지 말아야 할 증상에 대한 너그러운 이유가 되어 주기 때문이다. 무의식은 그야말로 무의식이기 때문에 이것을 규정지어 보고자 작업의 대부분은 뜬금없고 이상할 수 밖에 없으며 대부분의 경우 아무도 이해할 수 없는 헤프닝 으로 끝나고 만다. 무의식에 내면화된 슬픔과 연인들의 어떤 극적인 사건이 맞물려 발생되는 그 눈물나게 아름다운 화학작용이 많은 문학과 예술의 주제가 되어왔던 것만 보아도, 이것은 대부분의 현실세계에서 쉽게 일어나는 일이 아니거나 아예 일어나지 않았던 일이다.
또 다른 누군가는 사랑이란 그저 좋은 느낌이라고 한다. 우리는 사랑을 통해 많은 좋은 느낌을 받을 수 있다. 마침내 보호받고 이해받는 다는 느낌, 둘 사이의 경계가 비로소 무너지며 하나가 되는 듯한 흔치 않은 느낌을 받을 수 있다. 그래서 사랑에 빠지는 일은 언제나 가장 큰 쾌락이라고 알려져 왔다. 하지만 느낌은 길지 않고 거기다 한껏 높아진 역치는 언제나 더 큰, 다른 종류의 느낌을 기대한다. 또 느낌이란 사실 상대가, 혹은 사려깊은 연인의 경우 서로가 서로에게, 좋은 느낌이라는 목적에 대한 수단이 될 뿐이라는 우울한 관점도 존재한다. 거기다 요새는 손쉽게 사고 팔 수도 있다.
다른 관점으로 사랑이란 상대의 성장을 진심으로 바라는 마음이라고 한다. 실존의 두려움이라고 하는 거창한 무언가에 먹혀서 도피하지 않기 위해 우리는 세상과 관계를 맺어야 한다고. 연인의 진정한 사랑은 둘의 세계를 확장하고 서로를 통해 비로소 세상과 관계하는 것 이라고 한다. 하지만 나는 충분히 보통 사람이라 이런 멋진 생각에 한참 휘둘리고 난 뒤에 곰곰히 여러가지 방법들을 떠올려 보다가 이것은 참 비현실적이라는 생각을 하며 혹시나 누구에게라도 이런 이야기를 하지 않았던걸 다행으로 생각하곤 한다.
연인들은 사실 헤어짐보다는 헤어짐 이후에 찾아오는 모든게 괜찮게 되어버린 상태를 더 견디지 못한다고 한다. 점쟁이나 상담사를 찾아온 중년 남녀가 기나긴 이야기 끝에 하는 질문은 결국 '아직도 내가 사랑을 할 수 있을까요?' 라고 한다. 또 모든 살인중에 가장 불필요 하면서도 잔인한 방식의 살인은 치정살인이다. 보시다시피 사랑의 감정은 중요해 보이는데도 '아직도 내가 사랑을 할 수 있을까요?' 라고 묻는 누군가의 표정이 왠지 삶과 동떨어진 혹은 이기적인, 그것도 아니면 우스꽝스럽게만 느껴지는 이유는 뭘까? 나는 사랑 노래를 즐겨듣고, 대부분의 노래는 사랑 노래고 가끔 사랑에 대한 글조각을 꼬깃꼬깃 써보기도 하며 어떤 환상을 꿈꾸기도 한다. 하지만 앞서 저렇게 시간을 들여 사랑의 가치를 평가절하 하고자 했던 이유는 뭘까? 왜 사랑이란 단어는 우리에게 큰 희망을 주기도 하지만 사랑의 추구는 꽤나 자주 삶과 생활의 파괴나 지탄의 대상이 되기도 하는걸까? 위험한 사랑과 그렇지 않은 사랑의 차이란건 존재하는걸까?
언젠가 나는 못의 날개를 들으며 H에게 이런걸 물어본적이 있다. 그러면 슬픈 사랑은 없는거냐고, 나 때문에 많이 슬퍼한 H는 슬픈 사랑은 없다고 했다. 단호하고 매몰차게, 하지만 아무리 억지를 부려 보아도 연인은 결국 어떤식으로든 헤어지고 우리는 슬퍼진다. 그리고 만약 헤어짐의 슬픔이 연인과 함께하는 기쁨을 이제는 받을 수 없는데서 비롯되는 것 이라고 가정한다면 역사나 사랑으로 인한 슬픔은 그것으로 인해 얻은 기쁨의 양과 같거나 적어도 비슷하다는 흔한 결론을 낼 수 있다. 또 그 슬픔은 감정이므로 정당함을 따지는 일도 조금은 맞지않아 보인다. 사랑의 과정속에 어떤식으로든지 간에 슬픔이 존재한다면 그걸 슬픈 사랑이라고 하지 못할 이유는 없다. 그러므로 모든 사랑은 언젠가는 슬픈게 아닐까? 역시나 흔한 관점이다. 가장 큰 기쁨의 표현과 슬픔의 표현이 사실은 같은 방식으로 나타난다는 점을 보면 기쁨은 슬픔과 아주 많이 닮아있다. 그리고 기쁨과 슬픔을 하나로 묶었을때 우리가 가장 자연스레 연상하는 단어는 역시나 사랑이다.
결국 우리가 추구하거나 바라고 있는 사랑이란 그저 아직은 슬퍼지기 전의 사랑이 아닌걸까 하는 생각을 해본다. 동시에 여러가지 사랑을 멋지게 뛰어 넘나드는 사람들의 인생이 대부분 피곤한 이유는 그 사람이 얻은 기쁨만큼의 슬픔을 꾸준히 지불해야 하기 때문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해본다. 혼자서만 하는 사랑이든, 금지된 사랑이든, 불륜이든지 간에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슬픈 사랑은 그저 슬픔이 너무 가까이 와있거나 그것의 도래가 너무나도 눈에 잘 보이는, 그래서 사랑으로 인한 기쁨과 슬픔의 상태가 공존하거나 교차하는 상태가 아닌걸까? 하는 다소 위험한 생각도 해본다. 그리고 사랑이 가정과 인류의 평화에 이바지 한다는 생각이야 말로 정말 대단한 마케팅이라는 생각을 버릇없이 또 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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