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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

과소평가

얼마전 J를 만나 맥주를 두잔이나 마셨다. 성공한 직장인의 전형을 보이고 있는 J를 잡고 나는 말했다. 40이 넘으면 나보다 늦게 들어왔을 뿐인 사람들을 착취하는 것이 유일한 생존의 방식이 되는 지금의 구조를 받아 들이는 것은 아마도 나의 판단력에 가장 나쁜 영향을 끼칠 것이라고, 적어도 지금의 나에게는 그럴 것 같다고 말했다. 그래서 나는 직장에서 성공하지 못할 것 같다고 했다. 물론 부지런히 대안을 찾아야 겠다고, 수년쯤 미뤄놓고 있는 대안을 설명하는 일도 빼놓지 않았다. 그 부분에서 아직 절망하고 있지 않는 제스쳐를 취하며 꽤나 자랑스럽게도 이야기 했다.


하지만 다른 사람의 눈을 통해야 비로소 형태를 가지게 되는 이 대안을 위해 나는 오늘 아무 일을 하지 않았으므로 이것은 직장생활에 대한 대안이라기 보다는 현실의 외면을 위한 비현실로써의 대안이라고 생각하는 것이 정상이다. 어쩄거나 나는 지금 착취를 당하고 있다고 생각하고, 별탈없는한 그 처지를 벗어나자마자 바로 착취하는 일에 착수하게 될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일련의 과정들이 머리를 나쁘게 할 것이라고, 그리고 나도 모르게 깊은 상처를 남길 것이라고 요 몇달간 생각해 왔다. 하지만 내가 잘못 생각한 것 같다. 나는 그렇게 섬세하고 선량한 사람이 아니었다. 


나는 사람들을 죽이는 사람들의 말을 들어야 하는 사람이 아니다. 그리고 조만간 죽임을 당할 사람도 아니고, 사람을 직접 죽이는 사람들과 같이 점심식사를 해야 하는 처지의 사람도 아니다. 하지만 이것은 내가 살아가는 공간과 시간을 맘대로 결정할 수 없다는 점에서, 그리고 내가 지극히 보통사람이라는 사실에서 완전한 우연의 결과이다. 운이 좋아서 나는 직접적인 살인의 가해자도, 피해자도 방관자도 될 수 없었다. 하지만 이것도 전적으로 옳은말은 아니다.


전세계약이 올해면 끝이다. 길건너 조금 더 큰 평수의 아파트에 살며 업라이트 피아노와 방음실을 가지고 싶어 나는 조금 더 큰규모의 빚을 영리하게 끌어올 생각을 했다. 하지만 집값이 오를리가 없으므로 아파트를 사는것이 과연 옳은 판단인지를 알기 위해서 마침 적당한 제목의 책도 봤다. 책에는 현실의 정확한 인식이 항상 현실에 대한 좋은 결과를 끌어낼 수 있는 것은 아니라고 써있었다. 나의 태도가 결과에 영향을 끼치게 될 수 있는 한 당사자는 최대한 현실을 보기 좋게 가공하고 그것에서 용기를 얻어낼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실패하는 사람을 사람의 범주에 넣지 않는 다면 이것은 진실이다.


그 일이 발생한지 벌써 1년이 지났다. 그동안 나는 가끔 눈치보며 투덜대기만 했을뿐 아무런 행동을 하지 않았다. 그러면서도 동시에 저멀리 있는 어떤 불의를 견딜 수 없다며 똑똑한 대안을 찾아다니고 떠들어 대며 적당히 둘러대고 있었다. 또한 오직 나를 위해서만 벌고 나를 위해서만 쓰면서도 더욱 더 소비하기 편한 환경을 만들기 위해 참 열심히도 고민했다. 이 모든건 편안한 잠자리와 지속적인 식욕을 포기할 수 없는 나의 강력한 의지와 무관심을 너무나도 과소평가 했기 때문에 가능한 일들이다. 뭐라도 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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