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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

눈금에 대한 이야기

 간만에 한국에 돌아와 영어공부를 하며 즐거운 시간을 보내고 있는 B가 아침에 화가 난다며 카톡을 보내왔다. B는 특유의 용기와 민감함을 이용해 사진으로 먹고 살 궁리를 하는 실로 보기드문 사람이다. 비전공자인 한 그가 아마도 충분히 사진으로 먹고살 수 있을 것 같은 동네는 심지어 우리나라도 아니다. 아무튼간 B는 사진을 찍거나, 찍고 싶어하는 사람들이 많이 들어가는 국내 모 커뮤니티의 게시글의 링크를 세개나 보내며 자기가 지금 영어공부를 위해 읽고 있는 BBC와 뉴욕타임즈 보다 이 게시글들이 비현실적인 것 같고 게시글에 참여하고 있는 모두가 조금 미친것 같다고 했다.


<게시글 1. 은행원 연봉 실수령액>

 사람들은 이 글에서 은행원의 연봉과 그들, 혹은 다른 직장인들의 원천징수액과 실수령액의 차이를 여러가지 사례를 들어 설명하고 있다. 주장은 엇갈렸기 때문에 모두는 정확한 숫자를 알 수 없었고, 소모적인 논의는 계속되고 있었다. 나는 그것을 호기심있게 지켜보며 의견의 차이가 백만단위로만 좁혀줬으면 나와 어느정도 비교를 해보며 스스로 괜찮다고 말할 수도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했다. 하지만 극적인 타결로 인해 차이가 좁혀지거나, 그것으로 내가 어떠한 위안을 받을 수 있을지는 여전히 요원해 보인다. 또한 모든 숫자가 명명백백하게 밝혀지더라도 왜인지 사람들은 그것을 나름의 방식으로 해석하고 싶어 할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게시글 2. 니콘 바디 서열 정리했습니다.>

 작성자는 니콘 카메라 바디의 모델명을 나열하며 이것을 몇가지로 분류했다. 플래그쉽 모델을 필두로 중급기, 보급기, 입문기 등으로 분류된 목을들 보며 사람들은 서열이라는 단어선정에 대한 불만과 빠진 모델에 대한 지적, 그리고 분류의 적정성에 대해 이의를 제기하였다. 나는 사진에 대한 지식은 물론 카메라에 대한 어떠한 지식도 없기 때문에 이것이 대강 가격대에 대한 분류라는 생각은 들지만, B와 나를 포함한 대부분의 사람들이 열거된 카메라의 성능이나 디자인보다는 서열이란 단어에 굉장히 민감해 했다는 사실이 인상깊었다.


<게시글 3. 가게 결제건게 대해서 잘못한건 인정하고 제가 또 할말은 하겠습니다 ㄷㄷㄷㄷㄷㄷㄷ>

 아마도 작성자는 기존에 어느 가게에서 점원의 실수로 잘못 결제가 된것을 다시 결재하기 위해 가게 점원을 자기가 있는 곳으로 찾아오라고 한적이 있는 것 같다. 그리고 그것에 대한 글을 쓰고, 또한 사람들에게 욕을 먹은것 같다. 그래서 이를 해명하기 위해 다시 글을 쓰게 된 것으로 보인다. 글은 평이했고, 아무래도 나보다는 가게에서 잘못한거니까 굳이 한가지를 선택해야 한다면 가게 점원이 오는것이 맞다라고 나름 납득이 갈만하게 작성자는 주장했다. 뭐 그게 욕먹을만한 일인지 따질만큼 나는 상황을 알지 못하고, 알고 싶지도 않지만, 작성자가 거기서 이러고 있을 시간과 노력을 아마도 참 난처해하고 있을 점원에게 썼더라면 둘다 참 좋았을 것이라는는 건 아마도 사실일 것이다.


 B가 보내준 게시글을 읽으며 나는 어떤 오래된 사람의 주장이 생각났다. 사람은 자기가 만들지도 않은 세상에 원하지도 않았지만 완전하게 던져진 존재로써 살아가게 된다고 그 사람은 말했다. 또 던져진 것도 억울한데 살아가는 방법이나 삶에서 퇴장해야 하는 시기와 방법조차 마음대로 정하지 못하고 그저 불시에 강제적으로 정해지게 된다고 했다. 그러한 사실을 참아내거나 무시하는 것은 사람의 능력밖이며 이것은 무엇보다 불안으로써 자각된다고 말했다.


 물론 그는 이러한 사실들의 대안으로써 이것을 민감하게 자각하고 스스로 나름의 의미를 조직하여 주장함으로 이러한 처지를 벗어날 수 있다고 했는데, 글쎄 여전히 나는 충분히 보통사람이라 이러한 대안은 여전히 비현실적으로만 느껴진다. 다만, 나와 나의 사람들을 둘러싼 어제와 내일, 그리고 수많은 가능성과 의외성들의 존재감에 눌려서 삐지고 징징대지 않기 위해 애매하지만 중요한 것들에 어느정도의 의미를 부여해야겠다는 생각은 하는데, 나는 얼마전 그것을 눈금을 매기는 작업이라고 부르기로 했다. 그리고 B의 짜증남도 내가 시간을 들여 아닌 척 결국 흉을 본 게시글 속에 등장하는 모든 사람들의 심정도 나와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모두 다 불안해서,


 그래서 나는 B에가 말했다. 아마도 모두가 불안해서 그런거 아니겠냐고, 나는 나의 눈금을 확실히 적어 놓고 주변 사람들에게 괜찮다고 말해달라고 한다고, 또 저 사람들은 바보다! 그런식으로 불안이 해소 되지 않는다! 라고 스스로 이야기 하려고 애쓴다고, B는 자기는 소심하므로 그냥 안보고 말아야 겠다고 했다. 그리고 우리는 긴밀한 상호칭찬의 관계선상에 있는사람들이므로 B는 나에게 건전하고 현명하다고 까지 말해주었다. 글쎄, 내가 스스로 주장한 방법대로 살고 있다면 나름 칭찬을 받을 만한 일일 수도 있겠지만 나는 말과 행동이 대강이라도 같은 그런 어른스러운 사람이 아니었다.


 어느새 새로운 연인이 생겼다. 당연히 그 새로운 연인에게도 새로운 연인이 생긴 셈이고 이것은 사람들에게 가장 좋은 일들 중에 좋은 일이라고 알려져 있다. 하지만 나는, 혹은 우리는 아주 행복한 와중에서도 이따금 아직도 새겨져 있는 어떤 사건들의 눈금에 괴로워 하고 있다. 특히 내가 괴로워 하고 있다. 또한 나는 그 아이의 과거와 현재와 미래의 모든 가능성들을 나로써 채우고 싶어하는 말도 안되는 바램을 사랑이라고 우기며 징징대고 있었다. 사랑은 서로가 필요할때 그냥 그렇다고 말하며 대충 넘기는 거라고 말도 안되는 주장을 하기도 하고, 시덥잖은 일에도 어떻게 나한테 그럴 수 있냐고 하면서 더 말도 안되는 억지를 부려가며 행복하거나 아니면 그냥 가만히만 있어도 서로에게 충분히 위로가 될 만한 소중한 시간들에 날카로운 눈금을 새기려고 노력하곤 한다.


 나도 아마도 불안한 것 같다. 나는 이제 막 혼자가 된다는 것의 의미와 그것의 막막함을 알아가고 있다. 또한 영원한 것은 없다고 그리고 그것을 안다고, 그래서 현재에만 집중하면 되는거라고 여러번 말하고 다녔던것 같지만 작금의 사실을 보아하면 나는 그것을 절대로 알고 있지 못하다. 그래서 자유에 대해서 그렇게 말하고 다녔음에도 나는 상대의 자유를 가져가버릴 나만의 행복한 자유를 영리하게 셈하고 있다. 그건 그런식으로 되는게 아닌데, 


 언젠가는 나는 그 아이에게 말한적 있다. 모든게 의미없다고 하더라도 나는 이 모든 망설임과 설레임들을 나름에 눈금에 소중히 새겨두었다고, 감사하다고. 그 당시 모든건 진심이었고 그래서 나는 항상 그 아이를 만났다는 사실에 감사하며 살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그 사실은 이따금 힘든 와중에서도 나에게 힘을 주는 소중한 눈금이 되어 주었다. 하지만 나는 여전히 미성숙하다. 대책없게도 사랑앞에서는 더욱 더 어려지는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그렇다고 해서 한없이 어리광 하며 상대를 짜증나게 하는 것이 나의 불안을 달래줄 것이라는 생각이 들지는 않는다. 그리고 나는 여전히 나와 그 아이의 행복을 바란다. 겸손하라. 심을 잃지 말라. 많은 사람들이 애용하고 있는 편리하고 착한 눈금을 나는 나의 시간들에 조금 더 깊이 새겨두어야 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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