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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록스 예찬

 회사를 다니며 알게 되는 말에는 여러가지 이상한 말이 있지만 그 중 압권은 비지니스 캐쥬얼이 아닌가 싶다. 분업화의 참담한 후예로써 분단위로 직장생활을 견뎌내고 있는 나는 회사일이 참 재미없어서 자꾸만 허드렛 일이라고 말하고 다닌다. 이말은 반쯤은 맞고 반쯤은 틀린데 허드렛 일이라고 하기에는 당장 내일부터 일을 안해버리면 누군가는 불편해 하기 때문에 어느 정도는 의미가 있는 일이겠고 그래서 아니라고 하기에는 누군가에게 보여주기 위한게 유일한 목적인, 완전한 내 관점에서 쓸데없는 일을 정말로 많이 하기 떄문이다. 혹은 의문을 제기할 수 없기 때문이던가.


 어쨌든 우리 회사의 공식적인 복장은 비지니스 캐주얼이다. 정장바지 대신 면바지는 가능하되 청바지는 안되고 운동화 안되고 구두 신어야 하고 셔츠는 바지에 넣어 입어야 하고 대신에 PK 티셔츠 말하자면 카라티는 빼서 입어도 되고 튀지 않는 색깔과 요란한 무늬나 그림이 없는 것을 입어야 한다. 정장은 이제 딱딱해 보여서 별로니까 됐고 그렇다고 너희 맘대로 입게 할 순 없으니 이런 식으로 통제를 해보겠다는 것으로 봐야할까? 어쨋건 이런 복장은 의외로 불편하고 잘 갖추려면 참 많은 돈이 든다. 결정적으로 일정한 수준을 갖추지 못하면 경우에 따라서 참 남루해 보이기 까지 하다.


 평일에 이러고 도서관에 한번 가보면 이게 얼마나 이상한 복장인지 알 수 있다. 도서관이라는 공간은 거기에 있는 대부분이 지금의 자신의 상태를 벗어나고자 한다는 점에서 공통점을 가지고 있다. 따라서 대부분의 사람들은 현재의 상태를 극복의 대상으로 보기 떄문에 지금 당장에 모습에 그다지 신경쓰지 않는 듯하다. 그런 이유로 복장은 그냥 본연의 기능적인 역할에 충실하다. 반면에 비즈니스 캐주얼이란 누가봐도 회사를 다니거나 회사를 다니는 사람처럼 보이고 싶은 사람만이 입는 옷이기 때문에 다분히 현재 지향적인 옷차림이며 전시용, 계급적 목적이 강하다.


그래서 그런지 회사옷 입고 집근처 도서관 가는게 참 쪽팔렸다. 가장 처음에 그리고 가장 감각적으로 든 생각은 내가 아저씨가 되어버린 것 같다는 거다. 회사원이란 말과 아저씨라는 말이 참 가깝고 아저씨란 말이 보편적으로 수치스럽다는 가정하에 회사생활 이라는건, 그것도 본인은 허드렛 일이라고 생각하는, 어쩌면 조금 부끄러운 일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특히 도서관에서는 더욱 그런듯 하다. 이곳에서 사람들은 비교적 미래를 생각하거나 적어도 다른거 신경 안쓰고 당장의 현재를 살아가고 있기 떄문이다.


 짐이 많아지면 아무래도 백팩을 매는게 훨씬 편해서 혹은 멋진 비즈니스 캐주얼을 가지지 못해서 출퇴근길에 반바지에 맨발에 크록스 라는 신발을 신고 다니기 시작했다. 몇달 이렇게 살아보니 생각보다 많은 것들이 변했고 크록스는 정말 물건이다. 일단 발이 아주 편하고 견고하다. 맨발에 신을 수 있고 그럼에도 슬리퍼 와는 또 느낌이 많이 다른데 생각해 보니 발가락의 노출 여부가 결정적인 차이가 아닌가 싶다. 또 1년쯤 신었는데 아직도 멀쩡한걸 보면 수명에 비해 가격도 꽤나 저렴한 편이다. 


 간편한 복장 때문인지 왠지 가벼워진 맘에 출퇴근 길에 책을 들고 다닐 수 있게 됐고 이건 내 독서량의 대부분을 차지하게 된다. 옷갈아 입지 않고 도서관에 바로 갈 수 있게 됐고 거기에서도 그들과 무리 없이 섞여 들어갈 수 있다는 점은 평일 공부량에 긍정적인 영향을 미치게 됐다. 회사에서 옷을 갈아 입고 퇴근 하는 행위는 왠지 어떤 경계선을 긋는 느낌이라 오래 잊고 있었던 하지만 사실 매일 매일 느껴야 하는 해방의 느낌을 가질 수 있게 해주었다.


 오늘 아침 출근길에 우연히 마주친 같은 빌딩에 근무하는 꽃집 아주머니는 그렇게 하고 있으니 대학생 같다고 한다. 반면 얼마전에 반바지에 크록스 신고 오랜만에 만난 친구들은 내가 아저씨가 다 됐다고 한다. 결정적으로 사람들은 주변 사람들에게 사실 별로 관심이 없다. 따라서 옷차림 하나에 혹은 신발 하나에 많은 것이 변했다고 이렇게 떠드는 것은 아마 아직도 끈질긴 자기애에 기반한 참으로 쓸데없는 자격지심이겠다. 하지만 이런 생각들은 나를 참 기분좋게 한다. 아직은 허드렛일을 하는 사람으로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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