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E

[잡담] 꼴찌를 위한 즉흥음, 박남철

 초등학교 3학년쯤 차례를 정해 금요일 오후마다 시를 한편씩 외워 앞에서 읽어보라던 담임이 있었다. 은근 꾸준히 한학기쯤은 한거 같은데 이상하게 난 참 그런게 좋다. 엄마가 이런저런 시집들을 좀 가지고 있어서 그냥 그냥 읽어보곤 했는데, 그 중 '독자놈들 길들이기' 라는 시집이 있었다. 무슨 소린지 모르고 꽤나 열심히 읽었는데 마침 발표차례가 되어 거기에 있는 시를 한편 외워봤다. 다 외우고 엄마한테 들려줬는데 기억에 아마 이런 내용이었지 싶다. '쌍소리 사전; X발놈은 X을 할놈이니 미래지향적인 쌍소리가 되겠다.' 엄마는 웃으며 아마 선생님이 놀랄거라며 다른 시를 외우자해서 소년을 위한 목가를 외웠다. 그 시집은 아마 여러번 이사하면서 버렸지 싶은데 그러고 보면 엄마도 참 재미있는 사람이다. 더 알고 싶은데 왠지 그런건 참 어렵고 아쉽다.

 

 이 시집이 박남철 시인의 시집이란걸 스무살이 훨씬 넘어 알았다. 첫사랑이라는 시를 인터넷서 보고 나는 왜 나인가 하며 책상모서리 칼로 깍는 장면이 그맘때 마음에 담겼는지 별로 고민안하고 한권 샀다. 바다속의 흰 머리뫼라는 시집이다. 반정도는 시인도 무슨생각을 하고 쓴지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이상하게 나는 이런게 좋다. 그 중 와닿았던 구절,

 

 

꼴찌를 위한 즉흥곡

 

....

 그리하여 나는 이제 참는 법을 배운다. 나는 '1등'이나 '힘센 아이'를 그다지 좋아하지도 않지만, '3등'이나 '꼴찌'를 하고서도 조용히 부끄러워할 줄 모르고 세상에 대하여 온 쌍욕을 해대며 억지를 써대는 걸 큰 자랑으로 여기는 비뚤어진 아이들을 징계해대는 일도 멈출 때가 되었음을 이젠 느끼는 것이다.
 그리하여 나는 이제 참는 법을 배운다. 어차피 조용히 부끄러워하는 꼴찌이든 시끄럽게 떠들며 고래고래 '1등'을 향하여 술주정 같은 저주를 퍼부어대는 꼴찌이든 어차피 그들에게는 "조용한 침묵"이 가장 큰 위안이 되고 가장 큰 징계가 될 수 있음을 나는 이제 배우게 된 것이다.

 그리하여 나는 또한 안다. 어차피 나도 그들과 똑 같은 인생의 낙오자임을 안다. 그리하여 다만 그들이 자신들이 '낙오자'임을 너무 떠들 때 조용히 내 마음 속은 끓어오르는 저항을 침묵으로 느낄 수 있게 되었음을 나는 아는 것이다. 

....

 

 아침에 간만에 J를 만나 시간가는줄 모르고 신나게 떠들었다. 디아블로3 이야기 하고 여자이야기 하고 그러다 결국 회사와 결혼이야기를 하게 됐다. J는 커피숖 창문밖에 단정한 아파트들을 보며 거시적인 계획을 말했고 나는 좀 일찍도착해 혼자 앞으로의 직업에 대한 메모를 하던 노트를 보여줬다. 결국은 돈이야기이고 정말 이제 갓 등록금 융자 다 갚은 수준의 우리는 , 연봉은 J가 좀 더 받는다 ㅎㅎ, 이런저런 이야기들 사이에 소소하게 위안을 받았던거 같다. 여러가지 결론들 중에 J는 결국 삶은 이전에 막연히 생각해왔던 것만큼 절대로 잘되진 않을거라 어느정도 한정을 두어야 한다고 했고 나는 공감하지만 난 아직도 아직인것만 같고 거지같다고 했다. 빡빡한 삶의 원인과 대기업의 횡포, 국민의 정치수준 미달 같은 이야기도 당연히 했고 그때는 B가 보고 싶었다. 그리고 문득 박남철의 시가 떠올랐다.

 

 좌절은 어쩔 수 없이 발생할 수 밖에 없다. 상상해봤던 모든 삶은 언젠가 반드시 흙탕물에 곤두박질 치고 무지개 저너머에선 이쪽과 똑같이 힘든 사람들이 무지개 이너머를 노래하고 있다. 이미 오래전에 내 키를 훌쩍 넘겨버린 많은 생각들도 계획들도 어느새 손에 닿지 않을 만큼 멀다. 자의식의 관점에서 보면 결국은 모두가 낙오자 이며 앞으로의 삶은 이걸 탈없이 받아들이는 과정이 되어야 할것 같다는 예감이 든다. 다만 조금씩은 좋아지겠지 느끼며 너무 떠들지 않기로 한다. 모두가 낙오자임을 안다는 침묵의 소리가 왠지 그래도 괜찮다는 누군가의 이야기처럼 달콤하고 따뜻하게 들린다.

 

 

 

 

 

 


바다 속의 흰머리뫼(문학과지성 시인선 306)

저자
박남철 지음
출판사
문학과지성사 | 2005-08-29 출간
카테고리
시/에세이
책소개
『자본에 살어리랏다』이후 8년만에 나온 박남철 시인의 여섯번째 ...
가격비교

'E' 카테고리의 다른 글

깊은 심심함_피로사회  (0) 2012.12.14
손쉬운 말의 가사  (2) 2012.12.03
허세부리기_기형도_장미빛 인생  (4) 2012.11.21
박민규_갑을고시원 체류기  (0) 2012.09.18
그리는 연습을 해야할때?!?!?  (4) 2012.06.0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