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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세부리기_기형도_장미빛 인생

 군대가기 싫어서 병역특례를 했다. 4학년 1학기 마치고 시작해서 복무 끝나고 복학, 한학기 더 다니고 졸업했다. 공부를 못해서 학점이 안좋은게 아니고 모자라는 상황이라 마지막 학기임에도 불구하고 학점을 꽉꽉 채워 들어야 했다. 안그러면 4학년 3학기를 다녀야 하는데 말하자면 3학점 들으려고 500만원을 원금 균등상환으로 내야하는 상황.

 

 학점이 3.0이 안되서 공채는 못넣고 경력직으로 이력서를 하나 써봤는데 붙었다. 병특끝나고 복학하고 면접보고 입사하고 이게 한달만에 일어났는데 나는 회사간다 그러면 그냥 알았다고 C나 D줄줄 알았는데 교무과에 물어보니 그런 학칙은 없단다. 결국 교수한테 직접 잘 이야기 하라는건데 대부분의 교수들은 알았다고 하고 몇몇은 축하한다고 까지했다. 그래서 대강 과제하는 시늉을 하며 잘 넘어갔다.

 

 그 중에 교양과목이 한개가 있었는데 교수가 60대쯤 되지 않았나싶다. 교재로 자기가 쓴책을 사라고 하는데 아주 겸손하게 표현을 해봐도 책에는 별 내용이 없었다. 제본상태와 종이의 질에선 원가절감의 분위기가 물씬 풍겼고 초판의 아님에도 오타가 꽤 있었으며 결정적으로 책의 본문 (서문아니고..)에 본인의 실명과 본인만 대단하게 생각할법한 업적을 굳이 써놨다. 아무튼 교수한테 찾아가 내 상황을 설명하고 중간고사, 기말고사는 꼭 휴가내고 나와서 보겠다 했는데 출석빠지면 절대 학점을 못준다는거다. 기억은 잘 안나는데 아마 '안된다.', '너같은 얘들', '그러면 한학기 더다녀라.' , '나는 부끄러운게 없는 사람이다.' 뭐 이런이야기를 쓸데없이 길게 했었지 않나 싶다. 절박한 나는 두손가득 선물까지 사가며 빌었고 학과장한테도 이야기 했으나 학과장도 못도와준다고 했다.

 

 결국 그 과목은 F를 받았다. 나는 이미 회사를 다니고 있었고 혹시나 졸업을 못해 모든게 틀어질지 모른다는 생각에 신입사원이 가질법한 수준의 강도로 불안해했다. 당연히 화가 많이 났는데 할 수 있는건 고작 강의평가를 최하점 주는거 밖에 없었다. 물론 교수의 행동이 부당하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왜냐하면 관련규칙이 없다하고 아무도 나한테 대학서 공부하지 말라고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저딴 태도의 늙은이가 득시글한 세상이 내가 사는 세상이구나, 그들에게 나의 불안한 미음과 500백만원은 그저 부끄러운게 없는 자신의 삶에 비해 먼지구나, 따위의 생각이 들었다. 언제나 그들에게 무력한 나를 생각하는 일은 참 아프다.

 

 어쨌든 내가 할 수 있는건 강의평가를 최하점 주는게 전부였으므로 나는 학생 의견란에 다음의 글을 붙여넣는 허세를 부렸다. 그때도 지금도 여전히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곤 '그럴리 없겠지만 혹시 그 새끼가 저걸 읽고 짜증나지 않았을까?', '근데 이게 적절한 글일까?' 하는 상상을 하는게 전부다.

 

 

 

 

장미빛 인생

기형도

 

문을 열고 사내가 들어온다
모자를 벗자 그의 남루한 외투처럼
희끗희끗한 반백의 머리카락이 드러난다
삐걱이는 나무의자에 자신의 모든 것을 밀어넣고
그는 건강하고 탐욕스러운 두 손으로
우스꽝스럽게도 작은 컵을 움켜쥔다
단 한번이라도 저 커다란 손으로 그는
그럴듯한 상대의 목덜미를 쥐어본 적이 있었을까
사내는 말이 없다, 그는 함부로 자신의 시선을 사용하지 않는 대신
한 곳을 향해 그 어떤 체험들을 착취하고 있다
숱한 사건들의 매듭을 풀기 위해, 얼마나 가혹한 많은 방문객들을
저 시선은 노려보았을까, 여러 차례 거듭되는
의혹과 유혹을 맛본 자들의 그것처럼
그 어떤 육체의 무질서도 단호히 거부하는 어깨
어찌 보면 그 어떤 질투심에 스스로 감격하는 듯한 입술
분명 우두머리를 꿈꾸었을, 머리카락에 가리워진 귀
그러나 누가 감히 저 사내의 책임을 뒤집어쓰랴
사내는 여전히 말이 없다, 비로소 생각났다는 듯이
그는 두툼한 외투 속에서 무엇인가 끄집어낸다
고독의 완강한 저항을 뿌리치며, 어떤 대결도 각오하겠다는 듯이
사내는 주위를 두리번거린다, 얼굴 위를 걸어다니는 저 표정
삐걱이는 나무의자에 자신의 모든 것을 밀어넣고
사내는 그것으로 탁자 위를 파내기 시작한다
건장한 덩치를 굽힌 채, 느릿느릿
그러나 허겁지겁, 스스로의 명령에 힘을 넣어가며

 

나는 인생을 증오한다

 

 

 

 아, 다행이 4학년 3학기를 다니진 않았다. 겨울방학에 계절학기를 신청하고 교수한테 전화하고 빌고 찾아가고 마지막으로 눈많이 오는날 어떤 교수의 아파트 경비실에 레포트를 맡겨 놨기 때문이다.

 

 

 

 


입 속의 검은 잎(문학과지성시인선 80)

저자
기형도 지음
출판사
문학과지성사 | 1991-02-01 출간
카테고리
시/에세이
책소개
85년 동아일보 신춘 문예로 등단한 저자의 유고 시집.일상 속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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