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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민규_갑을고시원 체류기

 주말에 여친이랑 쇼파에 앉아 배달음식을 먹으며 슈퍼스타K를 봤다. 독립한지는 3년이 되었는데 티비 산지는 이제 두달쯤 된다. 티비 없이 사는게 왠지 멋져보인다고 생각했었는지 아니면 어차피 집에선 그냥 미드나 영화 다운받아보는게 전부라 그런지 티비가 그다지 필요하지 않았다. 물론 티비에 위성안테나 까지 달아 몇달보니 이걸 왜 진작 안했나 싶다.

 

 3년전에 집이랑 출퇴근거리가 한시간 반이 넘어 회사 근처에 300에 20짜리 원룸을 난생 처음 얻었다. 무조건 최대로 싸게 구해본건데 그건 그럴수 밖에 없어서 였다. 1년쯤 살았는데 가끔 어두운 벽지를 타고 낯선말들이 들려오는게 아마 옆집엔 중국사람이 살지 않았나 싶다. 다음에는 500에 40짜리 집에도 살아봤는데 공간이 참 넓어 원대한 계획을 가지고 꾸며보려 했으나 무지 덥고 추워서 집에 잘 안가고 돈아깝게 카페와 친해졌다. 한번은 친구 여친이 놀러 왔는데 여기 사람사는데 아니지 않냐고 한게 기억난다.

 

 이렇게 두번쯤 월세계약 혹은 실패를 하며 고생을 해보니 직장상사보다 내 삶에 영향을 더 많이 끼칠 수 있는 사람이 집주인이 될 수 있다는 것과 이상하게도 월세가 전세보다 비싸고 전세가 집사는거보다 비싸다는것, 그리고 우리나라는 사계절이 매우 뚜렷한 나라라는 것을 깨달았다. 또 다시 고생을 하며 은행을 오가고 복비를 몇십이나 줘가며 조그만 아파트를 전세로 마련했고 다음달이면 이제 이사온지 1년쯤된다. 그리고 앞으로 3년 정도 살것 같은 지금의 집과 회사는 여전히 한시간 거리다.

 

 박민규의 단편소설, 갑을고시원 체류기의 나는 스무살쯤에 집이 멸망해버려 월 9만원의 고시원에서 2년 6개월을 살았다. 고시패스 보다 삶은 더욱 어려웠지만 그는 그속에서도 살아남아 결혼을 했으며 이젠 집도 마련했다. 하지만 고시원의 그 작은 밀실에서 탈출한지 10년이 지난 지금에서도 자기한테는 고시원의 유전자가 이식되어 있다고 느끼며 아직도 세상을 커다란 밀실이라 생각한다. 결국 주인공은 어쨌거나 그 고시원이 아직도 있으면 좋겠다며 누구든 실패하고 쓰러지더라도, 아무것도 남지 않더라도 웅크린채 나마 잠들 수 있길 바라는데 아마 아직도 불확실한 인생에 대한 마지노선이 저정도로만 있어줬으면 하는 착한바램이 아닌가 싶다. 물론 이건 소설이고 내가 아는 세상엔 당연히 저런 낭만적인 마지노선 따위는 없다.

 

 쓰다보니 나는 무슨말을 하고 싶었는지 기억이 나지 않는다. 그냥 나는 주말에 여친이랑 새로산 쇼파에 앉아 남이 배달해 주는 음식을 먹으며 슈퍼스타K를 봤고 골든타임도 봤으며 박다빈은 노래를 참 잘했다. 그리고 나는 이제는 덜춥고 퇴근후 가만히 앉아 멍하니 티비를 보고 있으면 잠깐 잠깐씩 이거 괜찮은거 아닐까? 하는 기분이 들기까지 한다.

 

 

 

 


카스테라

저자
박민규 지음
출판사
문학동네 | 2012-03-20 출간
카테고리
소설
책소개
‘무규칙 이종 예술가’ 박민규 첫 소설집 『카스테라』 2003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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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럼 짐을 옮기겠습니다.

뭐랄까, 의외로 담담한 마음으로 나는 그렇게 얘기했다. 첫 달치 방세를 건네고, 장부에 신상을 기재하고, 키를 넘겨받던 그 순간―나는 갑자기 어른이 된 느낌이었고, 왠지 이 세계에 대해 조금은 알게 되었다는 기분이, 들었다. 멸망한 집에서 쉬쉬하며 그것들을 빼돌릴 때처럼, 나는 말없이 한 대의 컴퓨터와 다섯 개의 가방을 방으로 나르기 시작했다. 복도와 거의 폭이 일치하는 모니터를 나르며 친구는 이렇게 속삭였다.

 

여기서 사람이 살 수 있을까?

 

왠지 생각에 잠겨보지도 않은 채 덜컥 이런 곳에서 산다는 것은, 인간의 도리가 아니라는 말투였다. 듣는 사람에 따라, 또 새겨듣기에 따라 화가 나거나 서운하거나 서러움이 북받치기에 충분한 말이었다. 그런데 그 말을 듣는 순간, 나는 전혀 예상치 못한 뜻밖의 감정에 사로잡혔다. 이상한 일이었다. 나는 화가 나거나 서운하거나 서럽지 않고, 대신

 

외로웠다.

 

..

‘386 DX-Ⅱ’에 대해서는 도대체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모르겠다. 말이 필요 없다는 생각도 들고, 아주 많은 말이 필요하다는 생각도 든다. 그것은, 저절로 버려졌다. 언제 어느 때였는지조차 기억나지 않는다. 삶이란, 무엇이란, 말인가.

빚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의 생각이다. 역시나 시간이 지나면서 빚은 저절로 사라졌다. 세상은 그런 식으로 우리의 죄를 사해준다는 생각이 들기도 하고, 아니면 형이―죽음으로써 그 빚을 모두 갚았을 거란 생각이 들기도 한다. 어떤 쪽도, 결국은 빚이란 생각이다.

 

...
어쩌면 나는 여전히 그 밀실 속에서 살고 있다는 기분이다. 또 혹시나, 우리가 소유한 이 모든 것들이 실은 ‘386 DX-Ⅱ’와 같은 것들은 아닐까 걱정이다. 물론 그럴 리는 없겠지. 이 모든 것들은 나나 당신에게 실로 소중한 재산이고, 또 우리는 누구나 그것을 모으고 지키기 위해 살고 있을 테니, 말이다.  어쨌거나,

 

그 특이한 이름의 고시원이

아직도 그곳에 있었으면 좋겠다.

이 거대한 밀실 속에서

혹시 실패를 겪거나

쓰러지더라도

또 아무리 가진 것이 없어도

그 모두가 돌아와

잠들 수 있도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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