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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름휴가

 축복에는 여러가지 종류가 있지만 사노비로써 사노비법에 정해진대로 연차를 모두 쓸 수 있다는 것도 분명히 축복의 한 종류가 될 것이다. 또한 그걸 다 돈으로 받지 않아도 될 만큼 경제적으로 무능하지 않거나 무심한 것도 포함해서, 혹은 돈으로 받을 수 있다는 점을 포함해서, 다만 이 모든것을 나에게 주어진 축복이자 행운이라고 생각하는 대책없는 비굴함을 전제로,


 나는 이번주 월요일부터 금요일까지 일주일동안 연차를 냈다. 연차를 내기 위해선 연차사유와 행선지를 입력해야 한다. 떄마침 여름이라 연차사유는 하계휴가라고 할 수 있었지만 주말에 있는 시험을 준비하기 위해 도서관에 가기 위해서 휴가를 쓴 것이기 때문에 행선지 부분을 뭐라고 쓸까 고민하다가 그냥 산본동이라고 했다. 승인이 났기 때문에 나는 이번 일주일 동안 매일 도서관에 와서 짧게는 5시간, 길게는 15시간 동안 체류했다. 도서관에 체류하면서 공부라고 이름 붙여진 내 머리속의 맥락이 채점자가 보기에 합당한 맥락이 되기 위한 지루한 노력을 했고, 더불어 사노비가 아닌 공노비가 되기 위한 2,000자짜리 거짓말을 다섯개정도 쓰기도 했다.


 글을 쓰는건 참 어려운 일이지만 거짓말을 쓰는건 더욱 어려운 일이므로 시간이 참 많이 들었고 공부를 해야한다는 나와 그래도 어떻게든 2,000자를 채워서 공노비로 다시금 태어날 가능성을 획득해야 한다는 나는 자꾸만 싸웠다. 데드라인이 가까와오자 불합격과 중도포기, 혹은 불합격을 야기한 결국은 탈락인 지원에 대한 상상은 나를 압도했고 '해도해도 이건 너무한거 아닌가!' 하며 분노했지만 금새 분노를 처리할 수 있는 하나도 방법이 없다는 것을 깨달았으므로 차선책을 생각할 수 밖에 없었다. 그래서 나는 한 10분정도 지난 3년 중 가장 강렬한 자살충동을 느끼기도 했다. 하지만 나는 주변의 모든 자원을 집중해 끝마쳤고 이것이 가능했던 이유는 내가 너무나도 나약하고 비굴한 사람이기 때문일 것이다. B는 언젠가 이런 내가 가장 현실에 가까운 꿈을 꾸고 있다고 했다. 주변사람은 정말이지 이런 나는 사랑해준다. 이건 참 고마운일이다.


 데드라인인 오후 한시가 지났으므로 더 이상 거짓말을 수정할 수 없기 때문에 그래서 당분간은 편안히 공부를 해도 되는 시간들이 주어졌기 때문에 그래도 조금은 쉬어야 겠다는 생각에 잠깐 밖으로 나와서 걸었다. 내가 다니는 도서관은 오래돤 아파트단지 옆에 있고 그 아파트 단지는 산속에 혹은, 산곁에 있다. 그래서 도서관 정문 앞의 폭이 1미터 남짓한 길을 지나면 바로 산이다. 날씨가 많이 덥고 습했지만 산속에 꾸며놓은 벤치와 의자, 그리고 정자에는 놀러온 사람들이 많았다. 나에겐 뇌졸증으로 10년 정도 투병생활을 하시다 돌아가긴 외할아버지가 항상 앉은채, 혹은 누운채로 티비를 보시던 기억이 있다. 내가 이걸 앉은건지 누운건지 지금 이 시점에서도 고민을 하기 딱 좋게 생긴 의자인지 무엇인지 모르는 아무튼 사람을 참 편하게 해주는 그때 그 의자와 닮은 나무벤치에는 나시만 입은 아저씨들이 누워있었다. 어쩌면 탈진한 듯이, 아니면 즐기고 있다는 듯이. 그 모습을 볼때 마침 귀에 꽃힌 이어폰에서는 악숙한 노래가 흘러나왔고 기분이 좋아진 나는 왠지 이 모든게 웃겨서 몰래 혼자 한참을 웃었다. 공노비가 되고자 길고 긴 거짓말을 쓰느라 골몰했던 시간과 공부라고 하고 싶지만, 사실은 좀 더 훌륭한 사노비가 되어 조금 늦게 짤리기 위해 내 소중한 머릿속의 맥락을 조정하고 제한해야 하는 곧 펼쳐질 죽은 시간들 사이에 삶은 살짝 얼굴을 내민 것이다.


 삶이 아닌 것을 살아가는 나는 비굴함이라는 연료를 효율적으로 이용해 또 다른 삶이 아닌 삶을 숨가쁘게 넘나들긴 하지만, 그래도 전적으로 삶이 아니게만 살 수는 없는지 가끔씩 죽은 삶들 사이에선 삶이라고 할 수 있는 삶이 여름휴가처럼 불쑥 주어진다. 그래서 가끔 웃고 슬퍼하고 책을 읽기도 하고 더 운이 좋다면 글을 쓰기도 하지만, 나는 이 삶의 순간을 감사의 대상으로 삼아야 하는지 증오의 대상으로 삼아야 하는지 아직 결정하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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